일본인들은 겉과 속이 다르고 쉽게 속마음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친해지기 힘들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한국인들은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술자리를 몇 번 하다보면 형동생하며 쉽게 친해지는 반면, 일본인들은 왠지 모를 거리감이 있다. 국적이 달라서가 아니라 같은 일본인들 사이에도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것은 똑같다.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사귄 일본인 친구들과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한 친구들에게 밤늦게 술 마시자고 전화를 하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갑작스런 내 전화에 나와주는 친구는 없었다.
아직 일본문화에 익숙치 않았던 나는 시간이 지나서야 늦은 밤 전화하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갑작스런 술자리보다는 미리 약속된 술자리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밖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은 상황에 따라 합류해서 같이 놀거나 하기도 했지만, 일단 집에 들어가 있는 친구들이 갑작스런 술자리에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는 언제든 친한 사람 불러서 소주 한잔 할 수 있었는데, 일본 친구들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집을 얻을 때에도 일본인을 보증인으로 세워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들도 보증인 부탁을 선뜻 수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월세를 못 내면 보증인이 책임져야 되는 부분이라 쉽게 해줄 수 없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당시에는 매우 서운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사는 이상 서운하다고 해서 일본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고, 외국인에 대한 차별로 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본인들끼리도 태도는 똑같기 때문에 사실 서운해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일본인들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친분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10여년을 일본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집을 구하고 비자를 신청하고 그 어떤 것을 함에 있어서도 보증인 문제로 걱정할 일이 없어졌다. 흔쾌히 보증을 서주고 고민을 나누고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함에 있어 망설임이 없다. 그들 스스로 이 친구는 한국인이며 일본에서 사업하는 친구인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서로 알아두면 좋다는 식으로 내 소개를 대신해 준다.
나이가 같아야 친구라고 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나이와 상관없이 친구라는 말을 쓰는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일본인들은 자식처럼 챙겨주시기도 한다. 계절마다 제철과일을 보내주시거나, 남자 혼자 산다고 반찬, 간식, 심지어 쌀까지 보내주는 분도 있다. 생일선물, 크리스마스 선물은 물론이고 옷, 지갑, 손수건, 가방 등 생각이 날 때마다 선물을 주시는 분도 있다. 몇년전 과로로 건강이 안좋아졌을 때는 혈압측정계, 체온계, 체중계, 각종 건강보조식품까지 많이들 챙겨주시기도 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도움이나 호의를 받는 한국인들을 종종 불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일본인의 신뢰를 받는 사람은 없다. 오랜 시간 열심히 노력하며 일하고 항상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점차 호의적으로 변하는 것이 일본인이다. 술자리에서 웃고 떠들고 노는 것과는 별개로 나를 믿어주는 단계를 말한다. 그리고 사람을 신뢰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잘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일본인이다.
일본에서 영업이 굉장히 어렵다고들 한다. 그 이유를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거래처와의 신뢰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오래동안 거래를 하며 신뢰를 쌓은 거래처와의 관계를 쉽게 배신하지 않는 것이 일본이기 때문이다. 학연, 지연도 한국만큼 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번 거래가 성사되면 크게 실수하지 않는 이상 오래동안 거래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므로 영업을 통한 거래처 확보는 안정적인 사업전개를 위해 필수적이다. 물론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인은 특유의 사교성으로 쉽게 친해질 수 있지만, 일본인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인이 느끼기에 일본인은 쉽게 친해지기 힘들다는 인상이 있다. 그러나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릴 뿐, 정말 믿을만한 친구라는 인상을 주게되면 한없는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내가 겪은 일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