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는 남자

내가 한국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우리 가게는 일본인 손님이 99%로 대부분의 손님이 일본인이었다. 가게의 위치상 손님의 대부분은 직장인이었는데 홀서빙을 하는 녀석들이 일은 잘 하는데 손님들과 소통이 잘 안됬다. 


특히 혼자 오는 손님들은 대화 상대가 필요한지 가게가 많이 바쁘지 않은 타이밍에 직원들에게 이런 저런 대화를 시도하곤 하는데, 한국인이냐? 고향은 어디냐? 군대는 다녀왔냐? 일본 온지는 얼마나 됬냐? 일본은 왜 왔냐? 등의 질문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직원들은 하나같이 묻는 말에 단답형으로 대답할 뿐 대화를 이끌어 나갈 줄 모른다. 오사카 사람들의 특성이 쉽게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인데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내가 혼자 오는 손님들의 말 상대를 해주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친해진 손님은 단골이 되어 자주 오게 되었다. 직장인들이고 저마다 하는 일이 달라서 대화의 주제가 다양해지곤 하는데, 워낙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던 나는 대부분의 손님과 대화가 가능했고 심지어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교향곡, 악기 등에 대한 대화까지 나누며 연주회 초대를 받는 것을 보고 직원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깊이 있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 얕은 지식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된다며 직원들에게 뉴스정도는 꼭 챙겨보라는 말을 했지만 실천하는 녀석들이 없었다. 


그렇게 손님들과의 대화를 도맡아 하던 중 혼다상이라는 손님이 자주 오면서 친해지게 되었는데 일본에서 가장 큰 은행의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정해진 코스처럼 취업을 해서 무난히 승진코스를 밟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산적처럼 생긴 외모와 덩치에 비해 꽤 수다스럽고 학벌이나 경력에 비해 목소리가 경박했다. 처음에는 하이톤의 목소리로 너무 말을 많이 해서 듣고 있기가 피곤할 정도였는데, 대화를 자꾸 하다보니 목소리와는 달리 굉장히 지식이 풍부하고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미술에도 조예가 깊은 조금 별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와의 대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퇴근 후 자주 혼자서 가게에 왔었고, 틈이 나는 대로 대화를 했으나 많이 바빠서 대화를 못할 상황이면 혼자 음식을 마저 먹고는 다음에 온다며 돌아갔다. 그러다 하루는 건강검진을 받고 왔다며 꽤 이른 시간에 가게로 찾아왔고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기 전이라 영업중이 아님에도 주문한 음식과 술을 내어 주고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대화가 오고가다 갑자기 한일문제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가 곤란해 진다. 교육이 다르므로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일본인이 알고 있는 역사가 틀려서 아무리 주장을 해봤자 서로 결론에 다다를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사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로 강하게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주제가 나오면 은근슬쩍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곤 하는데, 혼다상은 이 주제가 거론되자마자 살짝 상기된 얼굴로 조목조목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역사책을 읽듯 시대와 사건을 중심으로 굉장히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말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교육과 한국인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아서 스스로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다는 혼다상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반박할 겨를도 없었지만 일방적인 한국의 비난이나 일본 옹호의 발언이 아니었고,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그의 설명에 사실 여부를 떠나 끝까지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경청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중 혼다상은 어느 대목에서 갑자기 나에게 사과를 했다. 


"한일합방은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기는 등 일본이 한국에 가져다 준 혜택도 분명 있지만, 이는 결코 한국이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며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고초와 서러움을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 일본이 나빴다. 정말 미안했다. 많은 역사 자료를 찾아보며 일본의 역사책에서 가르치는 아름다운 침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됬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라고 하며 내게 고개숙여 사과를 했다. 이미 지난 일인데 혼다상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그만하라며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혼다상을 일으켜 세웠다.


사실 일본에 살면서 역사문제로 일본인과 마찰이 생기는 일은 거의 없다. 일본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도 잘 없거니와 크게 관심도 없다. 그러나 한국 언론에도 가끔 소개되듯이 한일 문제에 대해 속깊은 사과를 하는 지식인, 정치인들이 있다. 이들 외에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학교에서 배운 얕은 지식뿐이거나 아예 관심도 없는 경우가 많으며, 우리가 언론에서 접하는 혐한시위나 우익단체는 그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일본이 어떠한 변명을 하던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은 것은 그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과오가 아닐 수 없고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역사이고 어떤 형태로든 매듭이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분노하고 그들의 반성과 사죄를 요구하며 감정을 낭비하고 있고 그들 중 대다수는 일제 시대를 겪어온 기성세대보다 더 분노하는 젊은이들이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 일본 여행 금지라도 해야 하는게 그들의 정서상 맞지 않을까 싶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복은 입지 않으면서 유카타를 입고, 일본 여행, 일본 제품, 일본 음식을 선호한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을 비난하면서도 일제시대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비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도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는 왜 그토록 일본이 미운 것일까? 그러면서 왜 일본을 좋아하는 것일까? 


우리는 일본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과거사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원하나?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 보상금? 아니면 과거의 잘못에 대한 대가로 일본이 우리나라에 약점 잡힌 듯 행동하기를 바라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 속에 약육강식의 전쟁은 필요악처럼 늘 있어왔고, 그를 통한 문화의 교류, 기술의 발전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문명이 탄생했다. 그런 수많은 전쟁들 속에 우리나라보다 더 큰 피혜를 입은 나라, 혹은 역사에서 그 이름마저 지워진 나라들도 많은데 그 모든 국가들이 침략자를 원망만 하며 스스로 피해자였다는 꼬리표를 달고 투정만 하고 있었던가?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받은 수모를 잊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그 원망의 화살이 대를 거치면서도 계속 일본에만 향해 있다면 우리나라의 발전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원망하기 보다는 당파싸움으로 극도로 부패하여 나라를 지켜낼 능력조차 없었던 구한말 선조들의 모습을 뒤돌아보며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의 우리에겐 과연 그럴 힘이 있을까?


매년 노벨상을 수상하는 일본과 달리 노벨상은 커녕 논문이나 특허의 숫자도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학력과 직업에 대한 차별이 없어 각 분야에서 세계 1,2위를 다투는 중소기업이 엄청나게 많고, 장인정신으로 무장하고 전통과 실력을 겸비한 중소 상공인들이 즐비한 일본과 달리, 노력이나 내실보다는 보여지는 것만 중시하고, 일부 대기업 외에는 국내시장에서 아웅다웅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과, 아무런 준비도 능력도 없이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면서 창업이라 말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대한민국은 우리네 아버지 세대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세계 그 어느나라보다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고 지금과 같은 삶의 수준을 누리고 있다. 삼성 등 일부 기업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고 한때 IT강국이고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이제 더 이상 한국은 IT강국이라 할 수 없으며 4차 산업혁명의 중심에도 대한민국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성장동력이 멈추고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과실이나 미처 정비되지 못한 것들이 많은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두고 기성세대를 비난해서도 안되며 비난할 자격을 가진 자도 없다. 기성세대로부터 바톤을 넘겨받은 젊은이들은 과연 기성세대보다 더 열심히 달려왔고 또 달리고 있는가? 과거의 과오는 잘했던 공마저 덮어버릴 정도로 부풀리고 깍아내리기만 하는 우리나라는 완벽한 사람들만 살고 있는 나라인가?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했건만 비난하고 욕하는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탓이 아니라 넘겨 받은 바톤을 들고 더 열심히 뛰지 않는 우리들 탓인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내 탓은 없고 그저 남 탓하기 좋아하는 한국인이라는 소리를 괜히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치인이고 국민이고 모두 뒤나 옆을 돌아보며 남 탓만 하고 있다. 그럴 시간에 앞을 바라보고 나아갈 생각이나 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압도하는 힘이 있고 기술력이 있고 경제력이 있다면 일본 정부의 태도가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본의 말 한마디에 온 국민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쪼잔한 모습의 한국이 아니라 작은 나라지만 무시할 수 없는 기술력과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써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략적으로 공생하고 더욱 윤택한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일본을 기웃거리면서도 빈정거리듯 일본을 욕하는 지금의 모습보다 더 멋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